얼마 전 연구자들을 만나러 갔다가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LaTeX가 열린 빈 화면에서 첫 문장부터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요즘 다들 AI를 많이 쓰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도 똑같았다.
블로그 글을 쓸 때도, 코드를 짤 때도 그렇다. 내가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정리한 뒤 결과물을 만드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대충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AI가 만들어준 첫 번째 형태를 본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한다. “이건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닌데.” “여기는 더 강조해야겠다.”
이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가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만나면 예전보다 더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현상에 대한 개념 혹은 연구들이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에피스테믹 액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에피스테믹 액션(Epistemic Action)이란?
에피스테믹 액션(Epistemic Action, 인식적 행동)은 어떤 물리적 목표를 직접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얻거나, 문제를 단순화하거나, 뇌의 인지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행하는 신체적·외부적 행동을 뜻합니다. 1994년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커시(David Kirsh)와 폴 마글리오(Paul Maglio)가 처음 제시한 개념입니다.
핵심 개념
- 목적: 마음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는 대신, 외부 환경을 물리적으로 바꾸어 계산을 더 쉽고 빠르게 만듭니다.
- 대조 개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접적인 물리적 변화를 만드는 실용적 행동(Pragmatic Action)과 반대됩니다.
- 인지적 오프로딩: 뇌가 처리해야 할 생각과 기억의 짐을 주변 환경으로 넘겨(offloading) 뇌의 에너지를 아낍니다.
일상적인 예시
- 테트리스 블록 돌리기: 블록을 어디에 둘지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하는 대신, 화면에서 블록을 미리 빠르게 돌려보며 맞춤 여부를 확인하는 행동입니다.
- 물리적 탐색: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상자를 흔들어 소리를 듣거나, 문을 밀어보아 잠겼는지 확인하고, 물에 발을 담가 온도를 파악하는 행동입니다.
- 디지털 UI 조작: 웹페이지를 마우스로 긁어보거나(드래그), 커서를 올리거나(호버), 화면을 확대/축소하며 필요한 정보를 찾는 행동입니다.
AI시대의 에피스테믹 액션
AI 시대에 '일단 만들고 수정하는 방식'이 익숙해지는 현상은 '에피스테믹 액션(Epistemic Action)'과 연결될 것 같다.
1. 프롬프트와 생성은 현대적인 '에피스테믹 액션'
과거의 에피스테믹 액션이 '테트리스 블록을 돌려보는 것'이었다면, AI 시대의 에피스테믹 액션은 'AI에게 일단 아무 프롬프트나 던져서 초안을 뽑아보는 것'이다.
- 외부 환경 이용하기: 대신 AI라는 외부 환경에 "일단 대충 써줘"라고 요청(에피스테믹 액션)하여 눈앞에 시각적인 결과물(초안)을 만들어낸다.
- 수정이 더 쉬운 이유: 눈앞에 일단 무언가(텍스트, 코드, 이미지)가 나타나면, 우리 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지적 부담'에서 벗어나 '틀린 부분을 찾아내고 다듬는 인지적 필터링' 모드로 전환됩니다. 이 과정이 훨씬 뇌에 부담이 적기 때문에 훨씬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2. 왜 '무(Zero)'에서 시작하는 게 더 어려워질까?
이를 심리학에서는 '복도 효과(Hallway Effect)'나 '백지 공포증(Blank Page Syndrome)'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 선택 과부하: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는 선택지가 무한대이다. 뇌는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고를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 기준점 편향(Anchoring Effect): AI가 만들어준 초안이 있으면, 좋든 싫든 그것이 '기준점(Anchor)'이 된다. 기준점이 생기면 뇌는 "이것보다 더 좋게", "이 부분은 다르게"처럼 상대적인 비교와 수정을 할 수 있어 작업 효율이 극대화된다. 따라서 AI 초안에 익숙해질수록, 기준점이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갔을 때 느끼는 막막함과 피로감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커지게 된다.
한계와 부작용
1. 의존적 오프로딩(Dependent Offloading)과 디스킬링(Deskilling)
연구2026년 대한인간공학회(JESK) 및 해외 인지 신경과학 연구들에 따르면, '무에서 시작하는 게 정말로 더 어려워지는 현상' 역시 실제 부작용으로 보고되었다. 이를 '의존적 인지 오프로딩'에 따른 '디스킬링(개인의 기술 퇴화)'이라고 부른다.
- 실험 결과: AI가 주는 완성된 형태의 초안을 수정하는 방식에 뇌가 길들여지면, 뇌의 '기획 및 개념화 근육(Generative Thinking)'이 급격히 약화된다.
- 결론: AI라는 비계(Scaffolding, 발판)가 없으면 아예 첫 삽을 뜨지 못하는 인지적 무력감을 느끼게 되며, 실제로 AI 없이는 작업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2. 디자인 고착(Design Fixation)과 생각의 수렴
스탠퍼드 디스쿨(Stanford d.school) 등의 최신 AI 창의성 연구에 따르면, '일단 만들고 수정하기' 방식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도 밝혀졌다.
- 연구 결과: AI가 준 초안을 수정하는 일은 편하지만, 인간의 뇌는 AI가 처음 제시한 방향성(Anchor)에 갇히게 된다(디자인 고착 효과).
- 결론: 무에서 시작할 때는 엉뚱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반면, AI 초안을 수정하는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결과물이 점차 평균적이고 뻔한 방향으로 수렴(Homogenization)하게 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생성형 AI의 인지적 오프로딩 이중 경로에 관한 연구(The Dual Pathways of AI Cognitive Offloading)에서는 이러한 의존적 활용의 한계를 지적하며, 결론적으로 교육자와 개발자가 AI 활용의 빈도보다는 인지적 주체성을 지키는 참여 방식에 집중하여 기술을 설계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스스로도 이런 방식의 부작용을 조금씩 체감하고 있다. 빈 화면에서 시작하는 힘이 약해지는 느낌도 있고, AI가 먼저 내놓은 방향에 생각이 쉽게 끌려가는 순간도 있다. 그렇다고 이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인간은 원래 도구와 환경에 기대어 생각해왔고, 중요한 건 그걸 끊어내는 게 아니라 내 주체성이 어디에서 약해질 수 있는지 계속 의식하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 때로는 일부러 빈 화면에서 시작해보고, 내 언어로 끝까지 생각해보는 연습도 필요하겠다. AI 덕분에 사고 방식이 바뀌는 지금, 그 변화 자체가 흥미롭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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