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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TIL #13] 어떤 붕괴를 기다리며 모래알을 떨어뜨리고 있는가

besoluble 장은솔 2026. 7. 21. 08:58

재영 님과 대화하다가 모래더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래알을 하나씩 떨어뜨리면 처음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쌓이다가 어느 순간 작은 붕괴가 일어나고, 때로는 모래더미 전체에 영향을 주는 큰 붕괴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모래알이 붕괴를 일으킬지는 미리 알 수 없다.


재영 님은 이 이야기를 우리가 하는 일과 연결해서 말씀해주셨다. 지금 하는 일이 당장 성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모래알을 계속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도가 기회로 이어질지, 어떤 경험이 나중에 쓰일지, 어떤 관계가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점을 계속 찍다 보면 언젠가 점들이 연결되어 선이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결국 점이 존재해야 나중에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꾸준히 행동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모래알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그런데 좀 더 복합적인 물리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3차원의 이야기라 흥미가 갔고, 궁금한 마음에 모래더미 모델에 대해 조금 더 찾아봤다.



참고한 글: 자기조직화 임계성과 모래더미 모델⁠

재영 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물리학의 자기조직임계성과 BTW 모래더미 모델로 설명할 수 있었다. BTW 모델은 물리학자 페르 박, 차오 탕, 쿠르트 비젠펠트가 복잡한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수학적 모델이다.

모델의 규칙은 단순하다.

1. 격자 위에 모래알을 하나씩 놓는다.
2. 한 지점에 일정 개수 이상의 모래알이 쌓이면 불안정해진다.
3. 불안정해진 지점의 모래알이 주변으로 흩어진다.
4. 그 영향으로 주변 지점도 불안정해지면 연쇄적인 붕괴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모래알을 추가해도 그저 쌓이기만 한다. 하지만 여러 지점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서는 모래알 하나가 주변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다시 다른 지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작은 변화가 큰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를 임계상태라고 한다.

1) 마지막 모래알이 결과를 혼자 만드는 것은 아니다

큰 붕괴를 일으킨 마지막 모래알이 특별히 크거나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이미 쌓여 있던 모래의 상태와 각 지점의 관계가 함께 작용한 결과다.

→ 💡 모래알을 계속 떨어뜨려야 한다.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든 마지막 행동만 특별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전에 했던 수많은 행동과 경험이 조건을 만들고 있었을 수 있다. 결국 결과는 마지막 시도 하나가 아니라, 이전까지의 축적과 당시의 조건이 함께 만든다.

2) 작은 붕괴는 자주, 큰 붕괴는 드물게 발생한다

모래더미 모델에서는 작은 붕괴가 자주 발생하고 큰 붕괴는 드물게 발생한다. 붕괴의 크기와 빈도는 흔히 다음과 같은 멱법칙으로 표현된다.

f(L)\sim L^{-p}

여기서 L은 붕괴의 크기이고, f(L)은 해당 크기의 붕괴가 발생하는 빈도다. p는 규모가 커질수록 빈도가 얼마나 빠르게 줄어드는지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p=2라면 붕괴 규모가 10배 커질 때 발생 빈도는 100분의 1이 된다. 작은 붕괴는 많이 발생하고, 큰 붕괴는 드물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 공식은 다음 붕괴가 언제 일어날지 알려주는 예측 공식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붕괴의 크기와 발생 빈도 사이에 어떤 통계적 관계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 💡 큰 결과만 기다리면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를 놓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붕괴라고 하면 눈에 띄는 큰 결과만 생각했다. 프로젝트의 성공, 새로운 기회, 분명한 성과처럼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있는 사건 말이다.

하지만 모래더미에서는 작은 붕괴도 계속 일어난다. 큰 사건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지만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삶과 업무에서도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늘어난 것,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게 된 것, 다음 시도가 조금 더 수월해진 것 역시 작은 변화일 수 있다.

3) 큰 붕괴가 더 드문데 왜 스케일 불변일까

처음에는 스케일 불변이라는 표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큰 붕괴가 작은 붕괴보다 적게 일어난다면 규모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여기서 불변인 것은 발생 빈도 자체가 아니라 붕괴의 크기와 빈도 사이의 관계다. 앞선 예처럼 p=2라고 가정하면 규모가 1에서 10으로 커질 때도 빈도는 100분의 1이 되고, 규모가 10에서 100으로 커질 때도 다시 100분의 1이 된다. 각 규모에서 발생 횟수는 다르지만, 규모가 커질 때 빈도가 감소하는 방식에는 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다만 이 관계가 모든 범위에서 무한히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래알 하나보다 작은 붕괴는 없고, 모래더미 전체보다 큰 붕괴도 없다. 여러 규모의 붕괴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시스템이 충분히 크고, 이를 확인할 만큼 충분한 관찰이 있어야 한다.

→ 💡 모래알의 개수만큼, 모래알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모래알이 필요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모래알이 몇 개밖에 없다면 다양한 크기의 붕괴가 생기기 어렵고, 축적된 것이 없다면 연쇄 반응도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단순히 양이 많다고 해서 큰 붕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러 지점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새로 들어오는 모래알이 기존에 쌓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모래알을 계속 떨어뜨리는 것만큼 어디에 떨어뜨리는지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아무 곳에나 흩어 놓는 것보다 내가 이미 쌓아온 경험, 관심, 관계와 이어지는 일을 할 때 새로운 행동이 이전의 축적과 작용할 가능성이 커진다.

4) 이론을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BTW 모래더미 모델은 현실의 모래더미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시스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적 모델이다. 사람과 조직은 실제 모래보다도 훨씬 많은 변수와 의도를 가진다.

따라서 이 모델이 삶과 업무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눈앞의 결과만으로 축적의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고, 작은 행동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을 제공한다.



모래더미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우리 팀이 지난 1년 동안 해온 일이었다. 우리는 대학과의 협업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팀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왔다. 당시에는 각각의 활동이 실제 협업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여러 대학에서 협업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거의 어떤 활동이 지금의 어떤 문의로 연결되었는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 팀을 알리고, 자료와 사례를 만들고, 관계와 경험을 쌓은 일이 협업 문의가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는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일을 하고, 배우고, 글을 쓰며 계속 모래알을 떨어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 행동들이 어디에 쌓이고 있으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행동의 이유가 비교적 분명했다. 그 이유들이 중요하지 않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나를 움직이기에는 이전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내적 동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 이전에 나를 움직였던 이유는 익숙해졌고 다음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언제 붕괴가 일어날지 모르니 계속 모래알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말은 위로가 된다. 실제로 팀에서는 그렇게 해온 일들이 뒤늦게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개인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른 채 계속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행동이 축적인지 소모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붕괴를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행동하다 보면 모래더미보다 내가 먼저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계속할지 멈출지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행동을 이어가면서 내가 무엇을 쌓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지금 하는 일들은 서로 연결되고 있는가?
  • 결과가 없어도 계속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 더 자주 해야 할 일과 줄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 지금의 행동을 통해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는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은 그림을 정확히 알고 점을 찍을 수는 없다. 행동하면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래알을 계속 떨어뜨리는 일과 내가 무엇을 쌓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붕괴가 찾아올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내가 기다리고 싶은 붕괴가 무엇인지는 계속 생각해보는 것이 내적동기를 만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