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블로그 활성화를 담당하는 동료분이 계신다. 나는 개인 블로그를 꾸준히 쓰고 브랜딩을 좋아해서, 그 분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졌다. 시작은 블로그 목록을 열어본 것이었다. 글마다 대표 이미지의 화풍이 제각각이었다. 3D 렌더도 있고, 자막을 얹은 밈 스타일도 있고, 만화 컷도 있고, 화면 캡처도 섞여 있었다. 한 블로그의 글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기도 했고, QA가 안 된(?) AI로 만든 이미지들이 글로 들어가는 흥미로운 진입점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표 이미지의 화풍이 글마다 달랐던 이전 상태
그래서 퀄리티 있는 썸네일을 제안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미지가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안을 여러 장 만들수록 화풍이 아니라 "이 이미지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미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화풍을 바꿔가며 만든 시안들
여러 이미지를 뽑아봐도 마음에 들지 않은 원인은 명확했다. "이번엔 이런 느낌"으로 화풍만 바꿨을 뿐, 그 이미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기준이 없으니 매번 새로 시작하는 셈이었고, 결과도 매번 달랐다.
막힌 지점에서 내 개인 블로그를 떠올렸다. 나는 글마다 펭귄이 등장하는 손그림을 넣는다. 흑백에, 일부러 어설프게 그린 낙서다. 그 이미지의 목적은 그날 내 상황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잘 그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 전문성보단 공감이 되는 그림을 필요로 한다.
회사 블로그 썸네일의 목적과 여기서 갈린다.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해야 하고, 글의 주제를 품위 있게 압축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 블로그용 프롬프트와 회사 블로그용 프롬프트를 나란히 놓고, 각 축이 어떻게 갈리는지 하나씩 정리해봤다.

개인용(왼쪽)과 회사용(오른쪽) 프롬프트 비교
| 매체·화풍 | 흑백 손그림 낙서 | 플랫 벡터 에디토리얼 일러스트(16:9) |
| 일관성의 축(고정 대상) | 캐릭터(펭귄)를 고정 | 스타일 시스템을 고정 |
| 기능 | 구체적 상황을 서술 | 주제를 개념으로 추상화 |
| 표현 방식 | 보이는 소품을 그대로 묘사 | 상징으로 치환(범고래·심해) |
| 색 | 지정 없음(사실상 흑백) | 심해 블루 계열, HEX 위계까지 명시 |
| 밀도·구도 | 규정 없음(자유) | 낮은 밀도, 핵심 하나 + 보조 2~3개 |
| 톤·무드 | 어설프게, 안 귀엽고 안 매끈하게 | 차분하고 침착하고 품위 있게 |
| 네거티브 제약 | 과한 완성도를 막음 | 브랜드 위반(글자·로고 등)을 막음 |
한 줄로 요약하면, 개인용 프롬프트의 대표 문장은 NOT CUTE, NOT POLISHED, 즉 어설픔을 지키는 것이고, 회사용의 대표 문장은 CALM, COMPOSED, DIGNIFIED, 즉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두 프롬프트의 지향점이 이 두 구절에 압축돼 있다.
회사용에서 가장 깎았던 부분은 이미지의 톤을 지시하는 부분이었다. "차분하게"라고만 쓰면 AI가 해석할 여지가 너무 넓었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개체를 넣자니 가치를 지향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AI가 적합한 표현을 찾아주어 넣게 되었다.
THE POISE OF AN ORCA GLIDING THROUGH DEEP WATER
직역하면 "깊은 물속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범고래의 poise"다. poise는 번역이 까다로운 단어인데, 침착함과 평정심,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과 기품을 한꺼번에 담고 있다. 이 구절은 그림에 범고래를 그리라는 지시가 아니다. 바로 앞의 CALM, COMPOSED, DIGNIFIED MOOD를 받아서,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비유로 못 박는 장치다. 색 지정이 심해 블루 계열이라, 그 세계관과 맞는 생물을 골라 무드를 설명한 것이다. 회사를 상징하는 범고래의 이미지를 개체를 제외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진지하고 무게감 있되 음침하지 않은" 요구와도 맞았다.
썸네일에는 검색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브랜딩과 일관성 쪽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작업에는 나 혼자 판단하지 못한 축이 하나 더 있었다. 블로그 활성화를 맡은 분이 알려준 것인데, 검색 결과에서 썸네일이 정사각형으로 잘려 노출되기 때문에, 타이틀과 로고가 그 정사각형 영역 안에 들어와 있어야 검색 노출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검색 결과에서 정사각형으로 잘리는 영역(빨간 테두리)에 타이틀과 로고를 배치한 가이드
이 관점은 브랜딩과 결이 다르다. 이미지 위에 얹는 타이틀과 로고는 정사각형 안쪽에 배치해야 잘려나가지 않는다. SEO 관점를 고려해본 적은 처음이라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한 세트로 정리됐다
목적과 축을 정하고 나니, 같은 프롬프트 골격에 주제만 바꿔 넣어도 톤이 유지됐다.

같은 스타일 시스템으로 만든 썸네일
글 목록 전체도 달라졌다.

제각각이던 대표 이미지가 한 세트로 정리된 모습
더 반가웠던 건 그 다음이다. 정리한 프롬프트를 넘겨드렸더니, 마지막 글 하나는 그분이 직접 썸네일을 만들어 올리셨다. 내가 이미지 몇 장을 대신 만들어준 게 아니라, 그분이 혼자 만들 수 있는 규칙을 넘겨드린 셈이 됐다.
예쁘게는 마지막 문제였다
돌아보면 이번 작업에서 오래 걸린 건 이미지를 뽑는 일이 아니라, 이 이미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하는 일이었다. 모든 사소한 일도 결국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에 맞는 조건을 세우는 일이라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 블로그의 어설픈 펭귄 이미지를 만든 경험이 회사 블로그의 품위 있는 심해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 점도 뿌듯했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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