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내 AX 공유회에서 다른 팀 동료가 발표를 했다. AX 관련 보고서를 AI와 함께 어떻게,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공유해주셨다.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나"에 관심이 쏠린다. 그래서 발표도 대체로 이런 기능이 있고, 이런 기술을 썼다는 이야기로 흐른다. 듣는 사람이 뭘 궁금해하는지보다 만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앞선다. 그런데 이 동료분이 만드신 자료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서 출발했다. 기능과 기술을 앞세우는 대신, 이걸 읽을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30초 안에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부터 정하고 시작했다.
예쁜 문서가 아니라, 설득되는 문서
자료의 표지 제목부터가 "AI로 예쁜 문서가 아니라, 설득되는 문서를 만들기"였다. 목적을 예쁜 문서 만들기가 아니라, 잠재 고객이 우리 회사가 AX에 진심이라는 걸 빠르게 이해하게 만드는 데 뒀다. 그래서 독자부터 정의했다. AX 도입을 결정하고 예산과 조직 변화를 승인하는, 비슷한 제안서를 이미 여러 개 받아본 바쁜 의사결정자다. 그런 독자가 문서를 읽는 방식은 이렇다.
“30초 안에 훑어보고, 걸리는 곳만 다시 찾아 읽고, 장식이 과한 페이지는 건너뛴다. 그래서 1페이지부터 무엇을 말하려는 문서인지 분명해야 하고, 건너뛰며 읽어도 메시지가 이어져야 한다.”
또 공감되고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고 AI에게 "알아서 예쁘게 만들어줘"라고 하면, AI slop을 넘어 예쁜 쓰레기가 된다. 보기에만 좋고, 실제 해본 것보다 크게 말하고, 모든 페이지가 같은 카드와 그라데이션으로 반복되고, 정작 독자가 읽는 방식과는 상관없는 정보가 나열되는 문서다. AI를 쓰면 결과물이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함정에 빠지기 더 쉽다.
그래서 이 자료에서 디자인은 가장 마지막 단계였다. 작업 순서는 이랬다.
- 원문 이해: AX 원문과 내부 맥락을 먼저 읽는다
- 독자 정의: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읽는가
- 메시지 구조: 설득 흐름과 증거를 배치한다
- 디자인: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그릇
만드는 사람의 말과 듣는 사람의 말
기능을 나열하고 기술 스택을 나열하는 건 전부 만든 사람 관점의 정보다. 직접 만든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고 애착이 가서 그걸 말하게 된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무슨 기술을 썼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게 나한테 뭘 해주는데", "이걸 맡기면 뭐가 달라지는데"로 판단한다. 만드는 사람이 하고 싶은 말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은 자주 어긋나는데, 만든 사람의 자리에서는 그 차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자료는 순서를 반대로 잡았다. "독자가 30초 안에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에서 역산해서, 보고서 전체를 하나의 설득 흐름으로 설계했다. 왜 이걸 제대로 해야 하는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제안하는지가 한 줄기로 이어진다. 발표든 문서든 내가 평소 흐릿하게만 느끼던 이 차이를 또렷하게 보여줘서 속이 시원(?)했다.
이 문서 자체가 AX의 작은 사례였다
이 보고서 자체를 AI 코딩 에이전트(Codex)와 함께 만드셨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한 번에 "완성해줘"라고 던지지 않았다. 80~90개의 작은 지시로 쪼갰다.
- "이 문장을 줄바꿈해라"
- "이 타이틀을 92%로 줄여라"
- "로고 그림자를 제거해라"
- "커버 이미지를 더 밝고 신뢰감 있게 바꿔라"
- "HTML 기준으로 PDF를 다시 export해라"
사람은 편집장이자 디렉터, 그리고 고객 관점의 리뷰어로 방향과 판단 기준을 잡고, AI는 HTML·CSS 편집과 PDF 변환 같은 반복 실행을 맡았다.
알게된 것 — slop을 경계한다는 것
발표를 보고 AI slop을 경계하면서 작업하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AI를 쓰면 뭐든 그럴듯한 결과물이 금방 나온다. 그래서 겉모습에 만족하고 거기서 멈추기 쉽다. slop을 경계한다는 건 그 지점에서 한 번 더 묻는 일이다. 이게 정말 어떤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만한 결과물인지 그냥 그럴듯해 보이는 작품인지.
그 경계가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문서를 만든 사람은 "예쁘게"에서 멈추지 않고 "누구를 설득하는가"로 계속 돌아갔다. 도구가 현란할수록 도구 자체에 매몰되기 쉬운데, slop을 경계하는 태도가 그 일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게 해준다는 걸 느꼈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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