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시간으로 잡았던 회의가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각자 하던 대로 하시죠”로 마무리됐다. 인터뷰도 하고, 책도 챕터별로 나눠 읽고, 퍼소나도 그려가며 공유된 이해를 만들어왔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의 결과물로 수렴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PTSD마냥 대학생 때 팀플하던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아무도 이 팀플을 어떻게 운영해서 어떤 결과물을 내야 할지 모르고, 답답한데 뭘 해야 할진 모르겠는 그 느낌.
처음엔 내가 유저 스토리 맵이라는 방법론을 충분히 체화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책 한 번 읽었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니까, 더 공부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회고하다 보니 그것만이 내가 느끼는 답답함의 이유는 아니었다. 진짜 내가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한 것은 “이 미팅을 왜 하는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 그러니까 퍼실리테이터로서의 역량이었다. AI랑 한참을 떠들다가 ihnokim 님의 블로그 글을 만났는데, 내가 왜 주어진 시간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지 못했는지를 짚어주는 글이었다. 오늘 TIL은 그 글을 챕터별로 정리하면서 나에게 대입해 생각해본 기록이다.
아래 내용은 ihnokim 님의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 의미있는 회의하기」를 읽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1. 퍼실리테이션의 정의 🪺
퍼실리테이션은 “집단의 공동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도록, 도구와 기법을 활용해 절차를 설계하고, 중립적 태도로 진행을 돕는 활동”이다. 퍼실리테이터는 회의의 주인공이 아니라 MC에 가깝다. 본인이 주도권을 쥐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 말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
내가 오늘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다”고 자책했던 게 사실 방향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2. 네 가지 기둥: 철학, 절차, 기술, 도구 🏛️
퍼실리테이션은 네 개의 기둥으로 받쳐진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회의가 무너진다.
철학: “모든 의견은 동등하게 귀중하다”는 인식, 그리고 중립
절차: 회의 전후를 포함한 전체 흐름 설계
기술: 질문, 경청, 기운, 기록 (QLES)
도구: 마인드맵, 4분면 차트, 유저 스토리 맵 같은 것들
3. 가장 충격적인 단락: 회의는 20%, 설계가 80% ⏳
이상적으로는 회의는 전체 과정의 20%, 회의 시작 전 회의를 설계하는 단계의 비중이 약 80%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회의의 전체 과정을 7단계로 나눈다.
1. 회의 요청/발의
2. 참여자 인터뷰 및 분석
3. 목적/결과물 합의
4. 진행 과정 설계
5. 회의 준비
( ~ 여기까지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
6. 회의 진행
7. 회의 평가
(회의는 길거나 복잡하지 않게 진행)
오늘 회의는 6번에 바로 들어간 거였다. 한 달 동안의 인터뷰랑 독서 모임은 사실 2번에 해당하는 작업이었고 헛짓이 아니었다. 다만 거기서 3번(목적/결과물 합의), 4번(진행 과정 설계)으로 못 넘어간 채로 회의실에 앉았던 거였다.
4. 네 가지 기술 — QLES 🛠️
Q (질문): 답을 실어 보내면 그건 질문이 아니라 ‘메시징’(답정너). 좋은 질문은 답이 열려있다.
L (경청): 발언 기회·경험담·조언 노리기(1~3Level)는 경청을 가장한 딴청. 진짜 경청은 추가 정보 탐색, 진의 파악(4~5Level)부터.
E (기운): 사람은 결정권이 있을 때 에너지가 난다. 소그룹(4~6명), 결정권 부여, 쾌적한 환경.
S (기록): 기록은 경청의 증거. 시각화된 기록 하나가 다른 세 기술을 다 끌고 온다.
5. 도구의 함정 ⚠️
잦은 도구의 남용은 오히려 비효율을 낳는다. 저자는 도구를 다 익힐 필요가 없고, 몇 가지 필살기만 적재적소에 쓰라고 한다. 보통은 포스트잇으로 의견 수렴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우리는 ‘유저 스토리 맵’을 꼭 써야 한다고 너무 강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도구는 보조 수단인데.
6. 언제 퍼실리테이션을 적용해야 하나 ✅
두 가지 조건이 모두 맞을 때:
1. 결론이 정해지지 않은 회의
2. 구성원에게 결정권이 있는 회의
우리 회의는 두 조건 다 해당된다. 즉, 퍼실리테이션이 진짜로 필요한 자리였고 그 관점으로 내가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많이 후회도 되면서 깨닫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반복해서 겪어왔지만 정의하지 못했던 답답함을 ‘퍼실리테이션’이라는 단어로 묶이는 순간, 앞으로는 그나마 다른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모두가 퍼실리테이터가 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여러 사람들의 이유 있는 생각들을 구조화하고 타인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내가 꼭 갖추고 싶은 역량이다.
오늘은 기대만큼 큰 무언가로 수렴시키지 못했고 팀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 같아 속상한 날이었지만, 그 속상함 덕분에 오랜 답답함의 이름을 찾았으니 그걸로 의미 있었다. 더 잘하고 싶다..ㅠㅠ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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